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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영] 금강화가 기산 정명희의 삶과 예술 출판기념회
유형 : 출판기념회
날짜 : 2018년 3월 22일(목)
시간 : 18:00
장소 : 대전중구문화원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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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명 : [허나영] 금강화가 기산 정명희의 삶과 예술 출판기념회 

장르 : 출판기념회 

날짜 : 2018년 3월 22일(목) 

시간 : 18:00 

장소 : 대전중구문화원 강당 



 




비단강에 뜬 저 휘영청이라니
- 그림 외길 쉰 다섯 해를 맞으며 -
기산  정명희

2017년을 마무리 하면서 우연찮게 책꽂이 구석진 곳에 유배?되어 고색창연하게 빛바랜 세로읽기로 편집된 ‘이광수전집(삼중당·1993)’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14-5년전 대청호변 방아실 작업실을 정리하면서 소장서적 중 꽤많은 미술분야 외국서적들은 대전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나머지 국내서적 중 제자들에게 필요한 책을 골라가도록 했었습니다. 그런데 목회자로 있는 아내의 서가에 꼽혀있었기에 살아남은 그 책을 발견한 것입니다.

춘원의 『사랑, 꿈(이광수전집10)』은 내겐 돌아온 탕자와도 같은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책을 펼치는 순간 ‘아-하 이래서 혈육이구나’를 직감했습니다. 책 속지에 그려진 그야말로 손바닥만한 1호 정도의 수채화 습작 두점(1994)과, 다른 책의 속지에 그려진 대입 재수시절의 수채화 풍경(1993) 한 점이 내 얼굴을 꿇어지게 보고 있었습니다. 춘원전집에 그려진 것은 마티스의 ‘댄스’와 ‘푸른 누드’를 묘사한 것이었습니다. 마치 단절되었던 세월과 이어지게 하는 징검다리 같은 매우 소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초등학교 6학년(1957)에 전학해와 만 60년을 대전에서 살았습니다. 평생을 대전에서 살았다해도 과언이 아닐 세월입니다. 불혹을 맞던 해에 담배를 끊으며 처음 만들어 본 명함 상단에 ‘대전을 사랑합니다’란 문구를 넣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화우들이 내 명함을 보고 ‘기산 다워’라며 뭐 그렇게까지 표를 내느냐는 눈빛이었지만, 때문에 대전을 더더욱 조명하게 됐고, 금강을 화두 삼았기로 「금강화가」란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1993)하던 해에 ‘죽미회竹美會’를 결성하고 다섯명의 까까머리들의 첫 전시회가 ‘충남공보관(현 대흥동광장)’이었으니 실로 쉰다섯 해가 흘렀습니다. 바람결이듯 꿈결같듯 한 ‘그림외길’이 가족들에겐 견디기 힘든 긴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내게 있어 두가지 난제가 바로 가정을 지키는 것과 창작을 병행하는 문제였으나 나는, 어느것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기산 정명희’하면 으레 따라붙는 수식어가 ‘아-, 대전 사람’이니 대전을 사랑한다고 말한 것에 대한 보답이려니, 또 ‘그만만이라도 하잖아’ 여기며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세상은 어떤 틀로 그림과 예술가를 볼까? 사회가 예술가를 보는 방법은 시대와 정비례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정곡을 찌르지도 못하나 봅니다. 내 그림을 보고 감동까지야 바라지않더라도 좋아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를 생각하면 그저 부끄럽기만 합니다.

좋은 그림을 볼 때 누구나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것은, 억지로 꾸며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된 자연에 익숙해 있기에 그럴 것입니다.
그림이 좋아서 ‘아- 나는 화가가 되고 싶다. 아니, 화가가 될 꺼야!’란 생각을 굳힌 것은 고등학생이던 때부터입니다. 무엇이 나를 화가의 길로 이끌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소명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어렵습니다.

‘피에타Pieta’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marroti(1475-15 64)가 25세 때 만든 작품입니다. ‘자비를 베푸소서’란 피에타를 비롯한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를 고교재학 시절 대전 대흥동 성당(당시 지역화단에 안주하잖은 최종태, 이남규, 이지휘, 이종수 선생 등의 수요미술모임이 있었음)에서 오기선吳基先(1907-1990) 신부님의 책을 통해 처음 접한 후 실로 반세기를 넘은 2015년 여름, 전시행사로 로마에 왔다가 바티칸 성당에서의 감격적인 해후를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늦게나마 알현을 허락한 것도 주께서 화가의 길을 허락하신 것이로구나 라고 믿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첫 회화작품이라는 말이 믿기지 않는 ‘천지창조’에서 ‘최후의 심판’까지, 목이 아프게 올려다보면서 울컥했던 감동은 필설로 형용하기 힘이 듭니다. 더구나 피에타를 자신이 만들었다기 보다는 바위 속에 있는 ‘마리아와 예수’를 꺼냈을 뿐이라고 겸손해 했었다니 예술가의 덕목을 새삼 되새기게 했습니다.
중국의 ‘운강석굴雲崗石窟’과 ‘용문석굴龍門石窟’을 비롯하여 중국 고궁박물관의 회화 작품들이나,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등과는 다른 견해가 필요합니다만, 좋은 작품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는 것에 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내가 월남전에서 돌아와 푸쉬킨의 싯귀처럼 절망과 싸우고 있을 때, 화가의 길을 걷도록 운보 김기창 雲甫 金基昶(1913-2001) 선생에게 이끈 이는 운산 조평휘 雲山 趙平彙(1932- ) 선배입니다. 운산사형雲山師兄이 신수회新樹會(1978) 회원으로 추천한 후 운보선생을 찾아뵈었을 때 ‘자네는 마음의 불구자는 아닐 테지?’라며 쏘아보시던 그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내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시며 ‘열심히 하게, 그림은 그림일 뿐이야.’란 말씀이 꾸며되잖은 자연스러운 조형미를 추구하란 깊은 뜻임을 한참 후에야 알았습니다.
나는 무엇이건 늦되는 사람입니다. 그림도 늦게 시작한 것은 아닌데 주위 친구들 보다 늦게 티었고, 뜻을 세우면 이룰 수 있다를 되뇌었지만 공모전도 그렇고, 국전초대작가도 폐지말미에야 턱걸이 하듯 현대미술초대전에 합류했습니다. 동료들이 대학교수로 활동할 때, 시간강사와 겸임교수에 머무르면서도 ‘나는 화가로 남을 거야’로 자위하는게 고작이었습니다. 이후 작품이 교과서에 실리고 국내외 여러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고 크고 작은 초대전에 작품을 출품하다 보니, 「기산 정명희」를 아는 이는 ‘아! 대전사람’정도의 시골화갑니다.

출발점을 잊을 만한 시점이 바로 끝의 시작이긴 합니다. 고졸한 조형언어를 찾아 평생을 싸워왔건만 발걸음은 죽은 자의 숨소리 같이 어지러움을 동반합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하자.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한 듯 보여도 사치스럽거나 치졸해 보이지 말자며 노력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게 물들기를 바랐던 황혼의 감동은 초겨울 궂은비로 을씨년스러워진 지금, 다시 시작하려는 것도 늦되는 운명에 길들여진 탓인가 봅니다. 그것은 아마도 20년째 마라톤을 해오며 젊은 생각을 수혈하고 있었기 때문일 겝니다.

백리 길을 가는 사람이 90리를 왔을 때, 이제 절반쯤 왔다고 여겨야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며, 정조正祖가 성균관 유생들에게 하사했다는 술잔에 새겨진 명문 ‘아유가빈我有嘉賓’을 생각합니다. 나는 무엇이며, 내 안에 있는 가빈은 또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이 척박한 세상에 내 놓인 것인가를 되새기며, 내 속에 있는 가빈에게 더 이상 상처를 주지 말고 잘 보호하며 제대로 지켜야만 세상에 태어난 몫을 이행하는 것이로구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려 향리에 흐르는 금강을 부여잡은 것도,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잊지 않으려는 생각이고 대전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조선의 그림을 공부하며 겸재謙齋와 추사秋史를 알았고, 동양화 6대가(小琳, 靑田, 深香, 毅齋, 心汕, 以堂)를 설렵하며, 스승 운보선생에 사사했습니다. 그러나 사야금강史野錦江에 이르러면 내 안의 가빈佳賓이 미래 지향적인 것에 적응하게하며 자연스럽게 우리 그림을 얻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하겠기에 금강에 담긴 메시지를 세상에 드러내려 황하와 나일강과 간디스강을 휘돌아 다녔습니다. 덕분에 고산高山 히말라야와 킬리만자로, 엘브르즈에 들어가 심연의 소리에 귀기우릴 수도 있었습니다.

최근 우리 고유의 악기인 편경編磬의 추상적 형태와 청자빛 닮은 숭고하고 경외스러운 소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석판의 떨림과 울림을 빛의 통섭으로 엮어 얻은 조형언어들을 작업에 대입시키며, 뜻 모를 희열을 맛보고 있습니다. 작년, ‘전남국제수묵프레비엔날레’와 ‘대전국제아트쇼’에 출품한 작품들이 작은 예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일보미술관의 개인전(2018.7.25.-30.)엔 대표적일 수 있는 작품 40여점이 출품됩니다. 빛과 소리의 어울림을 조형화하는 것은, 비디오와 오디오가 조화를 이루어 높은 영상미를 내는 것과 다름이 아닙니다. 강물의 속성이 그렇고 깔려있는 생태계가 인간의 삶에 끼치는 영향이 그렇습니다. 이 간극에는 긴세월 동안 차용해 온 물너울과 물비늘, 그리고 무지개로 띄운 작은 물알갱이의 유희가 숨죽이며 사야금강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하나뿐인 참 나, 내 안의 가빈과 함께 휘영청한 달빛을 맞으며 옥상에 앉아 붉게 타는 저녁 노을의 벅찬 감동은 아닐지라도, 이성을 잃지 않고 차분히 침묵하며 세속에 물들지 않은 삶을 약속했습니다. 막스 피카르트 Max Picard(1888-1965)는 ‘침묵의 세계’에서 ‘그림은 언어와 침묵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명쾌한 답을 떠올리며 그때 받았던 감동도 함께 엮었습니다. 요한 볼프강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1832)는 ‘언어를 가리켜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림이 언어와 침묵사이에 존재한다면 그림은 참으로 성스럽고 경외로운 것입니다. 자연自然이 무한히 경외로운 것처럼 말입니다.

이 같은 그림을 그리도록 허락하고 맡겨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껏 나를 보듬어준 대전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묵묵히 오늘이 마지막이듯 꾸며내지 않은 삶이려, 먼저간 선배들이 걸어간 길을 살피고 그것에서 자유스러워져 오롯이 나이려할 뿐입니다.
그날 밤, 휘영청한 기운에 말라붙다싶이한 심정을 이렇게 옮겨봤습니다.



청운의 꿈을 키우던 시절부터
어머니의 품 같은 그리움에
강을 그리면서
산을 품을 수 있었다.

철이 들면서
비단강인 그 강에 꼽혀
끝없이 엎어지고 잦혀지면서
얻어진 사야금강史野錦江도

곰나루 우김치로 내닫던
하늬 아범*의 외침에 힘 입어
곰삭고 뜸들어 익고 밴
우리그림을 알게 된 덕이다.

이순耳順과 고희古稀를 지나
희수喜壽를 넘보고서야
타향살이 끝에 만난 것 같은 
저 휘영청이라니

저 달빛에 구워낸 계룡분청마냥
오래오래 회자될 그림이려면
멈출 수 없는 변주가 지속돼야겠지

빛과 소리의 이중주가 빚은 존엄이
빛으로 탄생하는 소리의 귀향일테니

해방되던 해 정월 보름
그림에 죽고 살게 태어난 인연이 
그림 외길 쉰다섯 해를 맞아 보는 
비단강에 뜬 
저 휘영청이라니

- 비단강에 뜬 저 휘영청이라니 전문 -



독일 철학자 오이겐 핑크Eugen Fink(1905-1975)는 ‘초월적 현상학’을 통해 세상은 존재하는 것에 시간을 허락하고 공간을 부여한다고 했습니다. 소리와 빛(색깔)을 엮어 조형화한 나의 최근작들로 전통과 현대의 간극을 엮어 새롭게 거듭 낳았으면 합니다. 하여 「錦江, 그 멈출 수 없는 변주(정명희미술관, 조선일보미술관)」로 갖는 두번의 작품전과, 『기산 정명희 평전-금강화가 기산 정명희의 삶과 예술』의 출간에 거는 기대가 자못 큽니다.

잠시 머물다가는 인생에서 작업이 곧 싸움이고, 삶이고, 사랑인 온통 배틀아닌 것 없는 세월이었습니다. 얼굴이 마음의 창이듯 작품은 화가의 얼굴입니다. 그러나 그 창에 드러워진 커튼으로 인해 많은 오해가 파생되기도 합니다. 작품은 화가의 표현언어적 형태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행동의 한 형태이기도 한 때문입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Herman Hesse 1930)’처럼 예술가가 짊어져야할 고뇌며 멍에라 여겨 참고 견딘덕에 예까지 왔습니다.
돌이켜보면, 핑크적 성찰이 아니더라도, 작업이 자존을 지키는 유일한 도구였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존재가 소멸하는 날까지 지속해야 할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정명희 - 금강 그 멈출 수 없는 변주17-24



기산의 작품은 매번 놀랍다. 새로움에 놀라고 연속성에 놀란다. 한 작가의 예술인생이라는 유구한 강을 따라가다 예상 못한 풍경을 마주한 느낌이다. 기산의 작품은 한지 합지에 먹을 사용하는 수묵을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채색과 콜라주를 하여 현대적인 화면을 갖는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현대 추상회화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중첩되는 재료의 사용과 작가가 가진 문인적 정신이 결합되어 하나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다층적인 층위를 갖고 있다.
기산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그저 “그림이 나를 그리고, 스스로 저 살 궁리를 하는 것”이라며 너털웃음과 함께 평한다. 전시를 할 때마다 새로운 작품을 하지만, 그에 대해 미리 걱정하지 않고 그때 그때 주어진 화두나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바탕으로 작업하다보면 그림이 자연히 그를 이끈다는 것이다. 그 시작은 잘라 붙인 색종이일 때도 있고, 우연히 끌린 신문의 디자인일 때도 있다. 혹은 매일 새벽 운동길에 발견한 장구 마구리가 시작일 때도 있다. 그 시작이 무엇이 되었든 우선 작업을 시작하면 기산은 그 다음이 자연히 이루어진다고 한다. 마치 즉흥 연주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에는 그의 삶이 녹아있다. 이성적인 통제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몸에 내재되어 있던 감성적인 것들이 느리게 혹은 빠르게 화면에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속에 작가의 내면을 담은 글귀가 담긴다.


화중유시(畵中有詩)
원사대가 중 예찬은 문인 화가가 갖추어야할 첫 요인을 사기(士氣)로 보았다. 사기는 ‘선비의 품격’으로 이는 그저 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서양화와는 다르게 작품의 가치를 평하는 기준이 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개인사적 인생이 가십은 될지언정 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리진 않지만, 동양의 문인화에서는 작가의 기운(氣韻)이 그대로 작품에 반영되고 이것이 바로 작품의 격을 알 수 있는 척도였다. 이러한 문인화의 경지는 당대의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의 시와 그림이 그러했고, ‘왕유의 그림을 보면 그림 가운데 시가 있다’고 한 소식의 평에서도 알 수 있다. 기산 역시 여러 권의 시집을 내었고, 시(詩)와 화(畵)를 하나로 본 문인화(文人畵)처럼 즐겨 글귀를 그림 한켠에 배치하고는 했다. 
근작에서는 “보기 좋은 삶이, 행복한 삶일까?”와 같은 인생의 화두를 던지기도 하고, ‘멈출 수 없는 변주’라는 의미로 ‘Unbroken Variation’을 마치 결심이라도 하듯 반복적으로 쓰기도 한다. 이는 작품을 진행하면서 혹은 마무리 하면서 덧붙여져 그림의 의미를 더 깊게 만든다. 더불어 글귀를 통해 보는 이가 작품을 통해 사색하기를 희망한다. 예찬이 그린 빈 정자에서 청렴하고 고상한 문인의 인품을 깨닫는 단초가 되기를 희망하고 추사 김정희가 <세한도(歲寒圖)>에서 추위에도 곧은 소나무를 그려 자신을 오랫동안 믿어온 제자의 성정을 칭송하듯, 기산 역시 작품 속 글귀를 통해 그림을 감상하는 이들이 자신이 가진 인생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을 공유하길 바란다. 자신이 구현한 시각적 화면에서 말이다. 


편경(編磬)의 사각
기산의 근작에는 사각의 기하학적 형태가 두드러진다. 이는 2016년에 원형을 테마로 했던 금강홍(錦江虹) 시리즈와는 또 다른 변주다. 사각의 화면은 2017년 여름에 전시한 故 신동엽 시인의 미수(米壽)를 기리기 위한 작품에서도 등장했다. 손바닥 만 한 정사각형 화면에 먹과 색종이를 층층이 쌓아올려 이룬 시리즈로 동학운동의 저항정신을 표현한 신동엽 시인의 정신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근작 전남 국제수묵프레비엔날레에 출품한 사각 화면 안에도 마치 조각보처럼 크고 작은 사각의 색종이를 오려 붙여 화면을 잇기도 한다. 조각보와 같은 화면은 이전의 작품에서도 종종 등장해왔던 것으로, 기산에게 조각 하나 하나는 중생(衆生)의 마음을 상징한다. 중생이 하루를 살아내듯, 서로 다른 색과 크기, 형태의 조각들이 모이다 보면 결국 하나의 조각보가 된다. 그리고 이 조각보가 바로 인생이며, 우주이고 결국 신의 세계가 된다고 작가는 생각한다.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과 삶의 조각이 모여 이루는 광활한 우주의 원리를 신의 세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작은 색종이 조각으로 시각화한다. 간혹 종이 조각은 신문지 조각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사람의 얼굴이 있거나 혹은 글자가 있는 신문조각은 또 다른 삶의 결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화면을 만들어내다. 이러한 파피에 콜레(papier collé) 기법은 서양미술에서 아방가르드(Avant-Garde)적 사유를 했던 작가들의 방식으로, 이를 통해 기산의 작업은 수묵화라는 장르의 한계를 넘어선다. 
오랜 전부터 기산은 재료의 선택에 있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장구의 울림통 양쪽을 막는 장구 마구리를 화폭삼아 그리기도 하고, 화폭의 가장자리를 바느질 하듯 실을 박기도 하였다. 이는 수묵화를 전통적인 체계 안에서 해석하고 창조하려는 태도와는 다르다. 오히려 작가가 자신이 처한 현 시대를 이해하고 이를 예술적으로 시각화하는 데 있어 스스로에게 선택의 자유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술적 소재에 대한 선택의 자유로움은 전통악기인 편경으로 작가의 관심이 옮겨가면서 편경 특유의 각을 작품에 부여하게 하였다. 편경은 총 16개의 돌을 깎아 서로 다른 음이 나도록 세종(世宗)때 만들어진 악기이다. 미묘하게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은 각기 다른 각도와 두께를 갖고 있기 때문인데, 기산은 바로 소리의 미묘한 차이를 내기 위한 편경의 형태에 주목하였다. 사각의 화면 속에 기역자, 수직이나 수평의 사각형, 십자 형태로 배치된 사각형 등 다양한 사각들이 배치된다. 그리고 이 사각들은 음악의 한 소절처럼 자신의 리듬과 멜로디를 갖고 있으면서도 작가가 작품을 배치하는 방식에 따라 고요한 피아노곡이 되기도 하고 거대한 교향곡이 되기도 한다. 여러 작품 속의 사각들은 그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다. 두께나 길이, 혹은 색이 저마다 다르다. 그리고 이들은 마치 실제 음악의 진동처럼 작가가 화면을 기울이는 방향에 따라 물감이 흘러내리는 떨림을 가지고 있다. 
물감은 똑바르게 흐르는 듯 보여도 약간씩의 진동폭을 가지며 흘러내린다. 바탕의 질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긴 형태일 것인데, 이는 마치 소리가 공기 중에서 진동을 가지며 흘러 우리의 청각을 자극하는 것과 같은 원리처럼 느껴진다. 편경을 치면 그 소리가 진동 폭을 만들며 우리에게 다가오듯, 사각의 색면에서 흘러내린 물감은 우리에게 보는 것과 듣는 것이 결합되는 공감각적 경험을 하게 한다. 


편경의 울림과 금강의 물결의 일체화
물감의 흘러내림으로 시각화된 편경의 울림소리는 기산의 예술세계에서 금강으로 확장된다. 기산에게 있어 금강은 그의 삶과 예술의 원천이다. 일생의 대부분을 대전에서 터를 잡고 활동한 만큼 기산에게 있어 금강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기산은 금강(錦江)을 예찬한다. 비단강이라는 뜻처럼, 비단이 소란스레 뽐내기보다는 조용히 자신의 고고한 자태를 내보이듯, 금강 역시 유유히 흐르며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고 말한다. 절경이라고 할 만한 유독 빼어난 경치가 없음에도 충청남도를 넓게 돌아 품으며 백제의 문화를 만들어낸 저력을 가진 강이라 평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백제의 숨결이 있는 부여와 삼천궁녀의 전설이 서려있는 백마강이 바로 금강의 부분이니 금강을 빼고는 백제를, 그리고 충청남도를 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금강의 흐름처럼 기산은 작업을 계속하고파 한다. 
어린 시절 금강변에 터를 잡고 적지 않은 시간을 대전에서 작업을 하면서 그에게 있어 금강은 휴식이자 안식처였지만, 벗어날 수 없는 굴레와 같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 작업에 대한 고민이 생기고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그저 유유히 흐르는 금강의 우직함은 기산을 버티게 해주었다. 더하여 금강은 마음의 고향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얼마 전 다녀온 인도여행에서 본 갠지스 강을 말하며, 기산은 강이 가진 힘을 ‘정화와 치유’에서 찾는다. 겉보기에 깨끗해 보이지 않는 갠지스 강이지만 인도인들은 그 강의 신적인 힘을 믿으며 몸과 마음을 씻고 죽은 자를 떠내려 보낸다. 이러한 강의 힘을 기산은 더 일반화하여 물의 힘으로 여기고 예전부터 작품으로 표현해왔다. 작게는 한 잔의 물을 표현하기도 하고, 크게는 금강으로 나타낸다. 그에게 있어 강은 작업의 원천인 동시에 큰 힘이 되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러한 강을 보이는 풍경 그대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아야할 모습으로 추상화한다. 
기산은 수잔 랭거(Susanne K. Langer)의 말을 빌린다. “예술은 단순한 환영이 아니다! 예술은 최고의 실재이다!” 이에 따라 기산은 자신이 보고 느낀 금강 그 자체를 추상적 화면으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속에 만들어지는 금강의 물결은 편경의 울림과 같은 맥을 갖게 된다. 편경의 사각으로 만든 화면 역시 결국은 ‘금강의 변주(變奏)’이기 때문이다.


「기산의 새」의 눈으로...
전라북도 장수에서 시작해서 무주구천동을 지나, 조치원의 미호천과 대전의 갑천, 유등천, 대전천 등 크고 작은 지천과 곰나루와 백마강이 모여 이루어진 금강은 장항과 군산항을 통해 서해로 빠져나간다. 기산은 금강의 흐름을 설명하며 마치 자신의 삶의 굴곡인 듯 회상한다. 크게 멋들어진 곳은 없지만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는 금강의 모습처럼, 기산의 삶과 예술은 각 시간마다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금강처럼 유유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위를 「기산의 새」가 난다.
「기산의 새」는 스승인 운보 김기창의 ‘예수의 생애’를 방작 한 작품에서도 날고 있고, ‘금강홍’에서도 날고 있다. ‘한 잔의 물 컵’에 들어가 잠기기도 하고, 신동엽의 저항세계를 함께 들어보기도 한다. 그래서 「기산의 새」를 따르다보면 금강의 강줄기를 따라 흐르듯, 기산의 예술세계를 유영하며 들여다볼 수 있다. 어느 때는 하늘 높이 날며 강을 멀리서 바라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낮게 날면서 수면의 빛 그림자를 느끼기도 한다. 간혹 쉬고플 때는 강가에서 잠시 쉬면서 강의 물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러니 「기산의 새」를 따라 그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 보면 어떨까. 몸의 힘을 빼고 공중의 새가 되듯 날아 들어가, 작품 속 편경 소리를 들어보고 그 떨림을 몸으로 느껴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산은 작업중 그림이 마르기전 시작업을 통해 치유의 시간을 갖는다. 시작업의 하나로 문방사우중 하나인 벼루를 마르지 않게 한다는 것은 부지런히 작업한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시는 세월을 엮어온 기산의 일상을 반영한다.


마르지 않는 벼루는
격을 마르지 않게 하고
멋을 마르지 않게 하고
정을 마르지 않게 하고

미소까지 마르잖게 하는데
술조차 그렇다

- 정명희 작·마르지 않는 벼루 전문 -


 

정명희 - 금강, 그 멈출 수 없는 변주18-5



기산 정명희(箕山 鄭蓂熙)는 해방을 맞이하기 7개월 전인 1945년 1월 15일, 강원도 평강에서 녹조근정훈장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한 아버지 정락호(鄭樂浩)와, 예술가적 유전자를 심어주고 지병으로 요절한 어머니 이갑복(李甲馥)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특이하게도 그날 새벽 홍성(洪城) 본가의 큰 아버지가 태몽을 꿨다.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리는 새벽, 하얀 도포를 입은 노인이 강한 빛을 받으며 지팡이를 휘둘러 “집안에 경사가 났는데, 어서 일어나지 않고 무엇하느냐!”하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 꿈에서 큰아버지는 자신의 조카가 태어났음을 직감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책력풀로 알려진 콩과 식물의 지시초(知時草)에서 이름을 따 돌림자 앞에 붙여 명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어린 시절부터 천자문을 가르치며아껴주었다. 
그해 8월, 해방이 되었다. 평강에서 금광을 관리하던 기산의 아버지는 주인을 잃은 금광을 함께 일하던 직원들에게 나눠가지라 하고 트럭 한 대 만을 받아 짐을 싣고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 충남 홍성으로 향했다. 해방으로 혼란했던 때라 평강에서 홍성으로 바로 가기엔 쉽지 않아, 인천을 들러 홍성으로 내려가던 중 불행히도 인천에서 트럭을 도둑맞고 빈 몸으로 힘겹게 내려오게 되었다. 달포가 걸린 긴 여정이었다. 그래도 고향에 온 기쁨에 아버지는 기산의 출생신고를 했다.
기산은 전쟁에 대해 두 가지 큰 기억을 가지고 있다. 1950년 어린시절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 서산경찰서 뒤 개울 건너에 살았다. 매일 아침 북한군이 시체를 도랑에 버리면 마을 주민들이 울부짖으며 시체를 찾아가는 소리를 듣고 보았다고 했다. 당시의 공포를 이렇게 회상한다.


참느라 이불을 뒤집어써도 무서웠다
코로 숨을 쉬면 소리가 커질까봐 입을 벌려 쉬었다
터져 나오던 불안이 지금도 오싹거리게 하고
파리 떼가 극성을 부리던 해질녘까지
혼자 어머니를 기다릴 때면 늘 오금이 저려왔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몸을 피해 있었기에 그 두려움은 더 컸다. 기산은 군 복무 중 베트남으로 파병을 가면서 또 한 번 전쟁을 겪는다. 다행히도 전투요원은 아니었지만 적진 한복판이었기에 생사를 오가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영화 속 낭만적인 장면은 현실과 멀었고, 밤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극성스런 모기떼와 싸워야했다. 현재 고엽제 후유증으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국가유공자이다.
기산은 홍성에서 초등학교를 입학하지만, 아버지의 전근지를 따라 천안을 거쳐 대전으로 초등학교 6학년 때 전학해 왔다. 처음엔 대전 학생들의 텃세에 힘이 들어 방학만 되면 홍성의 큰아버지 집으로  도망치곤 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인생은 대전에서 시작될 운명이었다고, 훗날 회상한다. 


화가를 꿈꾼 소년
대전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쳐 대전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기산은 음악가 윤이상(1917-1995)과 예술가 백남준(1932-2006)을 알게 되고, 최인훈의 『광장』과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변신』과  『심판』 등을 읽었다. 또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의 철학에 빠지게 된다. 참 당찬 소년이었을 듯하다. 기산은 고등학생 때 이미 헌책방을 통해 구입한 일본서적 ‘미술수첩’ ‘아트리에’ 등을 보면서 미술대 학생에 버금하는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그 잡지를 통해 미국의 현대예술가 존 케이지(John Cage)를 알았고 단음으로 연주되는 그의 음악을 들었다. 윤이상의 곡이나 백남준의 작품에 대해 전공자들도 그 난해함을 논하고, 니체의 철학 역시 쉽게 이해하긴 어려웠을 터인데 일찍부터 남다른 면을 보인 것이다. 무엇보다 최인훈과 카프카의 소설을 비롯하여 그가 관심을 두었던 예술가와 학자들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전위적’인 특성을 갖는다. 문화에서 아방가르드라 불리는 속성을 가진 이들은 기존의 체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다. 전쟁에서 가장 최전선에서 적진을 공격하는 천병부대처럼 아방가르드적인 관점을 가진 이러한 예술과 철학에 기산이 소년 시절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이후, 그가 작품에 끊임없이 적용하는 시도들의 씨앗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은 상황으로 볼 때 지금도 아방가르드적이냐는 물음에 기산은 “순수미술의 거부가 아닌 혁신적 사고에 의한 미래지향적 가치관을 갖는다.”라고 대답했었다. 

기산은 고등학교 시절 미술부에서 활동하면서 화가의 꿈을 키우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1학년 때인 42회 전국체전 포스터 공모에 출품하여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당시에는 전국체전의 위상이 높아, 개최한 도시가 축제분위기가 되던 때이니 십대 소년에게 대상 선정은 꿈과 같은 일이었다. 우스운 일화는 상장과 부상 뿐 아니라 상금도 있었는데, 순진한 수상 학생에게는 말하지 않고 담당교사가 상금을 썼다는 것이다, 그런 일을 그도 후일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대가 그랬고, 당시 소년에게는 상금을 못 받았다는 섭섭함보다 자신에게 화가로서의 자질이 있음을 증명 받았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더 기뻤다. 더불어 홍대와 서울대, 한국미협 등의 실기대회에서도 특선을 하면서 더욱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부상으로 받았던 물감과 화구통을 메고 화가가 꿈인 소년은 온종일 대전시내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그 시절이 다 그랬듯이 카키색 군복을 검게 염색해 입고 화구통을 울러멘모습에 스스로 대견했을 것이다. 고등학교 동기와 후배인 양창제, 김룡, 임양수, 이영수 등과 미술단체 죽미회(竹美會)를 1962년 결성하였다. 1963년 재수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남공보관에서 죽미회 5인전을 열어 화가로서 첫 등단을 했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십대들의 전시이니 가볍게 볼 수도 있었겠지만 이들에게는 큰 의미였다. 그래서 50년이 지난 2013년에는 양창제, 임양수와 함께 죽미회 50주년 기념전(대전중구문화원)을 열었다. 그 중 한 명은 세상에 없고, 하나는 이민을 가서 연락이 끊겼기에 5명의 완전한 모습은 아니어서 아쉬웠다. 죽미회 전시 때 기산의 작품은 서양화 방식의 습작이었지만, 자신이 그린 그림을 전시를 하는 화가 인생의 시작점이었다. 아쉽게도 이 당시 그렸던 그림들은 그가 군복무를 하는 동안 그림을 모르는 계모의 손에 처분되어 남아있지 않다. 다만 최근 책장 구석에서 발견한 오래된 책 속지에 그린 수채화 몇 점으로 당시의 그림을 유추해볼 수 있다. 


한국화의 시작
고등학교 졸업 후 재수 끝에 1964년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에 입학하게 된다. 대학 입학 전 아버지의 반대가 심해 반항의 의미로 갖고 있던 화구들을 마당에 모아놓고 불을 지르기도 했고, 배우가 되겠다고 연극판을 기웃거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대학은 가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마음을 잡고 준비해서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에 들어갔다. 
이는 고 3때 담임이었던 신대현(충남대교수, 건양대 총장 역임) 선생이 입학원서 제출 당시 여러 장의 상장들을 첨부시켜준 덕이었을 것이라고 기산은 상기하고 있다. 기산은 그렇게 한국화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한국화라는 용어보다는 동양화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조선의 전통적인 회화보다는 일본화를 보급하려 하면서, 보다 보편적인 동양화라는 명칭을 쓰게 된 것이다. 이는 당시 일본을 통해 들어온 유화와 수채화와 같은 재료를 사용하는 서양화와 대비되는 단어였다. 서양화라는 용어 역시 서양에서는 보편적인 그림으로 생각하는 것이기에 그러한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새롭게 서구의 문화를 받아들이게 된 아시아에서는 기존의 전통회화와 구분되는 명칭이 필요했다.  그렇게 서양화와 구별되면서도 조선의 특성을 갖는 이름으로 동양화가 해방 후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해방 후에는 중국 뿐 아니라 일본과도 구분되는 우리 만의 회화의 특성을 지칭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대해 보다 근원적으로 우리 전통회화에 대한 논의가 바탕이 되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보다는 민족의식을 고양시키고자 한 일차적 목적으로 몇몇 작가와 평자들에 의해 ‘한국화’라는 새로운 용어가 제시되었다. 기산이 홍익대학교에 입학했던 시기에는 아직은 전반적으로는 동양화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었고, 간간이 한국화라는 단어가 사용되던 때이다. 그리고 1982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가 끝나고 시작된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동양화 대신 ‘한국화부’가 생기면서 보다 보편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동양화와 한국화라는 명칭은 혼용되고 있다. 대학마다 학과를 부르는 이름이 상이하며, 기관이나 단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어느 용어도 오랜 전통을 갖고 있고 현재에도 그려지고 있는 우리 그림에 대해 명확히 지칭해주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양화는 너무 넓은 범위를 가지며 한국화는 그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저 매체적 특성을 바탕으로 수묵화라 부르기도 하지만, 이는 수묵보다 더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우리의 채색 전통을 무시하는 처사이니 무엇이라 단정하여 부르기가 어렵다. 기산 역시 이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왔다. 그래서 최근에는 그저 ‘우리 그림’이라 하면 어떨지 조심스럽게 제안하기도 한다. 
이렇듯 당시 한국 화단은 그 명칭에서부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또한 사회적 분위기 역시 새마을운동과 고속도로 건설 등으로 엄청난 변혁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그래도 기산은 새로운 기대에 부풀어 있었고, 종로의 카네기홀이나 쎄시봉과 같은 음악다방에서 젊음을 누렸다. 학교에서는 천경자, 조복순, 배렴, 성재휴에게 수업을 들었고, 그 중에서도 성재휴에게 사군자를 따로 배우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는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현실과 예술 사이의 방황
열심히 노력해서 들어간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였지만, 다음해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당시 어머니는 마흔을 갓 넘은 젊은 나이였다. 기산은 이에 대한 충격으로 말없이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다가, 농아였던 내종형(이익호)의 권유로 대전농아학교에 교사로 들어갔다. 농아학교였던 만큼 학교에서 수화가 사용됐는데, 그 때의 경험이 훗날 스승인 운보 김기창 화백과 큰 인연을 맺는 데 큰 몫을 한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군에 입대하고, 이듬해인 1968년 베트남 전쟁에 파병을 지원한다. 앞서 말했듯 그의 두 번째 전쟁 경험이었다. 하지만 기산은 전쟁터에서도 화가의 자질을 활용할 수 있었다. 그가 한국화를 전공했다는 것을 안, 당시 연대장이었던 안재석 중령이 그림을 몇 점 그리게 하고, 그 그림을 근처 미군부대에 가지고 가서 극장, 사병 휴게실 등을 지을 목재나 시멘트 등 필요한 건축자재들로 바꿔오면서부터다. 기산의 작품이 열악한 조건이던 한국 군인들에게 요긴한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기산은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그 지휘관과 자주 만나 그 시절을 추억하곤 했다. 전쟁 중에도 ‘정선생’이라며 계급을 떠나 인정해주었던 부대장에 대해 기산은, 자신을 ‘300% 믿어준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는 장군으로 예편하여 스위스 대사와 언론사 대표 등을 역임했다. 그렇지만 전쟁은 역시 힘든 시간이었고 결국 부상을 입고 1969년 8월 귀국선을 탔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하였고,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한 해였다. 그런 도움을 주신 분이 또 있으시냐는 질문에 “월남전의 안 장군보다 더 열정적으로 살얼음판 같은 사회에서 나를 믿고 이끌어 주신 분이 몇 분 있지요. 한 분은 박선규 박사로 초기 남북적십자회담 교체 수석대표였던 외과 의산데 나를 ‘국제로타리’에 입회시켜 로타리 총재까지 이끌었고, 당신이 설립한 ‘소야장학재단’의 이사장직도 물려주신 분이며, 다른 한 분은 중부권을 대표하는 계룡건설을 세우신 이인구 회장으로 사옥 로비에 계룡산을 그린 내 큰 작품을 걸어주고, 작고하실 때까지 창작활동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으신 어른이셨죠. 그 유림 이인구 회장님도 나를 ‘계룡장학재단’의 이사로 위촉했는데... 그리고 보니 두 분 모두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이고 사회봉사에 앞장서신 분들이군요. 나는 후일 두 분의 영향으로 대전광역시교육청에 내 작품 모두를 기증하게 됐지요. 스승 운보 김기창 선생과 사형인 운산 조평휘 교수가 그렇고, 월남전에서의 안재석 장군 같은 분들이 고마운 멘토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감사한 분들 뿐이네요.” 기산은 지난했던 삶의 굴레에서 감사와 은혜를 잊지 않으려는 듯 자못 숙연한 표정이었다.

귀국한 기산은 복학을 준비했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가정형편은 어려웠고 두 여동생들의 학업을 지속시켜야 했기 때문이다(남동생은 군복무 중이었음). 농아학교에 복직을 했지만, 정식으로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미술교사 자격증이 필요했다. 결국 노력 끝에 1971년 교원자격고시에 합격을 하고 강경여자·중고등학교에 미술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그로인해 계모와의 관계로 편치 않았던 집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안정적인 직업도 갖게 되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화가의 길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전시를 했고, 교원자격고시를 준비하면서도 김여성, 김치중, 이영수 등과 ‘대전청년미술인회’를 발족하기도 하였다. 이후 대신중·고등학교와 동명중학교로 옮기면서도 화가와 교사의 길에서 방황을 하였다. 기산은 이때를 ‘밥에 대한 세상과의 진짜 싸움이 시작된 시기’였다고 회상한다. 결국 꿈을 쫓기로 결심하고 교직을 접으며 화실을 열어 그림을 시작한 것이다. 


화가의 길을 가다-한국화가로서의 정체성 모색기
기산 정명희의 결심을 응원이라도 하듯, 1971년에 만들어진 충남도전에 농악을 소재로 하여 그린 <월광>을 출품하여 동양화부문 최고상을 받는다. 사물놀이를 하는 인물을 크고 단순화하여 표현한 이 작품은 매입상금이었기에 충남예총에 그림이 소장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25년이나 지난 후, 한 사람이 <월광>을 들고 와서 그림을 그린 사람이 당신이니 사라고 했다고 한다. 갖고 온 <월광>은 여기저기 찢기고 상한 상태였다. 마음이 아팠지만 갖고 있던 적은 돈과 함께 소품 한 점을 넘기고 그 그림을 받았다. 마치 돌아온 탕자처럼 여겨졌기에 소중이 다시 복원했고 지금은 대전광역시 교육청의 ‘정명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어 1974년에는 백양회 공모전에서 특선을 받고, 국전에서 <반야>로 첫 입선을 하면서 화가로서의 입지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인생에서나 예술작업에서나 용기와 결단없이 해결된 것은 없다. 최소한 시대정신을 놓치지 않으면서 자신의 세계를 개척하고 창출하려는 기산의 작업이 세인의 눈길을 끌기 시작한 것이다.
화가라면 응당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할 것이다. 이를 위해 기산은 인물과 비구상 사이에서 갈등을 하다 수묵을 재료로 한 비구상 작품 <족보 시리즈>를 시작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다면 역사적으로 쌓여온 것들을 먼저 생각해봐야한다는 생각에서 조상들의 ‘족보’를 떠올린 것이다. 회화에 있어서의 정체성인 ‘점, 선, 면, 입체’와 같은 조형의 근본을 통하여 올바른 방향을 잡고자 한 것이다. <족보 시리즈>는 먹의 농담과 추상적 형태의 반복으로 이루어져있다.

이에 대해 홍경한은 기산이 “서구 모더니즘의 비정형의 공간개념에 깊이 심취”해 있었던 것으로 평가하면서 “자연현상에 대한 기산의 조형적 표출방법을 탐구” 하였다고 본다. 이에 대해 황효실은 당시 한국 화단 역시 비구상적 실험을 하던 시기였다는 점을 들면서 기산의 <족보 시리즈>를 “먹의 농담을 이용하여 점과 선으로 이어져 그려진 작품들은 당시 젊은 작가들의 시대 고민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고 평한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하여 1970년대에 한국화 내부에서 “새로운 회화의 모색과 형식적 또는 관념적 전통화법에의 반역으로 혁신적 실험을 시도하던 현상”  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1974년 23회 국전에서부터 한국화 분야에도 비구상 부문을 선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배경에는 1960년대에 결성된 ‘묵림회’의 역할이 컸다. 서울대학교 교수인 서세옥, 박노수 등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묵림회에서는 “재래의 매재와 방법을 탈피하여 한국화의 전통적 관념을 타파하는 여러 방법을 구사”하면서 “문인화의 고답적인 정신과 현대적 공간구성의 융화”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뿐 아니라 유럽의 엥포르멜(Intormel)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에 영향을 받은 서양화가들의 앵포르멜 회화가 한국화에도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특히 먹뿐 아니라 새로운 재료와 사용과 색다른 내용을 담는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권영우는 한지를 화면에 붙여 나타나는 우연의 효과를 만들었고, 이응노는 한지를 접거나 뭉쳐 입체적으로 만들어 붙였다. 그리고 천경자는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초현실적이고 몽환적인 화면으로 구현하였다. 

이렇듯 당시 한국화단은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한국화를 도모하고자 하던 때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맞추듯 기산 역시 수묵을 통한 추상작업을 해나가며 자신의 예술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확고한 예술세계를 만들지 못하였고 그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77년 경 기산에게 있어 화가가 되는 길을 알려준 운보 김기창 선생을 선배 조평휘의 소개로 만나게 된다. 이후 기산은 운보의 제자로서의 소임을 다하며, 인생과 예술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고, 전위적인 글을 읽던 고등학생이었던 기산 정명희는 새로운 한국화를 지향하던 운보의 가르침을 깊이 흡수하여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형성하였다. 


기산 정명희의 예술세계
기산은 교직에서 나온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쉬지 않고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크고 작은 사회적 활동들을 함께 하고 있다. 이러한 화가 기산 정명희의 예술세계는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970년에서 77년까지의 시기로 충남도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월광>이나 백양회 공모전 특선과 국전에 입선한 <반야>와 같은 인물 작업과 함께 수묵 추상으로 표현된 <족보 시리즈>가 혼재되어있는 시기로 한국화가로서의 정체성을 모색하였던 때이다.

두 번째 시기는 1978년부터 1996년까지로, 대전과 인근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실제 자연과 풍경을 소재로 한 산수화를 그린 때이다. 소재적인 면에서는 실제 경치를 그린 진경산수일 것이며, 수묵과 함께 채색을 사용하였다. 특히 1986년 최병식이 채묵화와 채묵기법을 소개하면서 이에 동의를 한 기산은 스스로에게 맞는 채묵방식을 찾아내기도 한다. 더불어 1985년 전후로부터 금강을 자신의 예술세계를 바칠 중심 소재로 삼은 것이다.

세 번째 시기는 1996년부터 2011년까지로 금강의 수면을 헤엄치는 오리와 새를 표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보다형태를 단순화한 시기이다. 더하여 신문이나 잡지 등의 이미지를 콜라주하고 아크릴 물감이나 옻칠을 함께 사용하는 등 재료적인 실험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시기는 2012년부터 현재까지의 시기로 금강을 형태적인 면에서 추상화함과 동시에 무지개, 일기, 편경의 음(音) 등 추상적인 관념과 연결시킨다. 작품의 범위를 가시적이면서도 비가시적인 영역으로까지 확대한 것이다.

1963년 죽미회 전을 미술계의 등단으로 본다면, 2018년은 55년의 세월이 흘렀고, 한국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1970년 기점으로 본다면 48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 오랜 시간동안 기산은 화가로서의 길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걸어오고 있다. 그의 삶에 대해 오랫동안 옆에서 보아온 평론가 변상형은 “일반적인 화가들의 활동반경과 남다른 행보를 보여준 선생은 예술 활동과 사회적 활동을 분리하지 않았다. 또 사회인으로서의 활동에서도 결코 예술을 분리해내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중국의 미술과 한국화를 연구한 최병식은 “기산 정명희가 즐겨 찾아왔던 대청댐 근처나 부여, 강경 등지 금강유역의 수려함도 중요하지만 우주 자연계의 본질적 섭리의 추구나 시시각각으로 생성되고 첨예화되어져가는 이 시대의 인문, 사회적 성찰 등이 특히 그의 입지로서는 더욱더 크게 인지되어야 한다” 고 말한다. 

혹자는 기산이 대전지역에만 국한된 한계를 가진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한 시각에 대해서는 홍경한의 평이 답이 될 것이다. 평론가 홍경한은 그가 “소수에 그치고 있는 대전화단의 주도멤버의 한 사람으로 … 서울권을 중심으로한정되어 활발하게 펼쳐질 때, 끊임없는 정체화 작업을 통하여퇴화와 타락을 스스로 견제하자는 각성의 징후가 혁신적으로 펼쳐짐을 지방에서 확산시킨 인물이다. 그런 탓에 그는 대전지역 현대수묵의 변화와 모색을 주도한 작가로 거론되고 있음은 물론 우리나라지방화단의 환경적 열악성과 정보의 낙후성에 비추어 다시 한번 그의 각고를 인정”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삶과 예술의 균형을 맞춘 화가, 지역에서 활동함에도 역사적 흐름에 뒤지지 않은 작가로서 기산은 꾸준히 노력을 한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한 그의 인생을 작품과 함께 간략하게나마 들여다 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예술에 대한 깊이와 고민을 다 담아내기엔 부족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그의 시를 통하여 삶과 예술에 대한 생각을 음미해보고자 한다.


한 끼 밥이
붓 한 자루보다
절실하던 시절부터 줄곧
열정, 그 허리를 잡아챈 것은
그림이기보다
그 그늘 뒤에 줄지어선
그림이게 하는 것들의
밥 한 끼로 하여
나를 곤욕케 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림이 밥이고
밥이 그림이었다
외람되게도
- 정명희 작·그림과 밥과 삶 전문 - 



 

정명희 - 오늘 이 하루야말로 축복받은 날이다



허나영 

현) 목원대학교 겸임교수
선화기독교미술관 학예실장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 석·박사취득
《넥스트 도어 앨리스》전 (2017, 모리스 갤러리, Art&Space312(홍익대)) 기획
《기억의 재구성》전 (2018, 대전중동작은미술관) 기획

저서  
『Next Door Alice』 (도서출판 건교, 2017)
『이중섭, 떠돌이 소의 꿈』 (아르떼, 2016)
『그림이 된 여인』 (도서출판 은행나무, 2016)
『키워드로 읽는 현대미술』 (미진사, 2011)
『화가 vs 화가』 (도서출판 은행나무, 2010)
그 외 공동번역 및 다수 평문 작성


정명희

정명희미술관 명예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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